다음은 본문을 발췌 요약한 글입니다.
# 누구를 위한 보호인가?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충격적인 비극이 일어날때, 우리가 보이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은 자기방어이며, 자기방어의 가장 빠른 선택이 회피이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회피를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진 비극과 사태에 대하여 고민하고 고통을 직면해야한다. 비극에 대해 말하고, 슬픔과 상실을 상징적으로 애도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한다. 즉 우리가 겪는 슬픔과 비극이 상징화할 수 있도록 허용되고, 애도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만 상처나 트라우마가 아닌 삶의 한 질곡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위치를 잡으면 증상으로 도래하지 않을 수 있다. 증상이 아닌 기억과 상처로 우리안에 자리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어떠한 방식이든 누군가를 잃었다면 그 잃은 자를 충분히 애도해야한다. 소리내어 물을 수 있어야 하고, 자유롭게 의문을 품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 충격과 슬픔을 제대로 경험하고 겪어야 한다. 그 결과가 충격과 흔들림이라도 연대를 통해 그것을 충분히 겪어낼 수 있도록 단단히 지탱하고 버텨줘야한다.
# 상실을 애도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잃어지지 않는 것을 잃어야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성장할 때 충분한 정서적, 물리적 양분을 공급받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적절한 때에 "이제 그만"이라고 하는 부권적 금지가 개입되는 것이다. 상실할 때에 상실해야하고, 제대로 잃어야 또다른 환상을 구축할 수 있다. 아이의 리비도는 커가면서 엄마젖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향하게 된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신의 젖가슴을 여전히 아이에게 쾌락의 산물로 제공하면서 다른 곳으로 에너지를 쏟거나 다른 곳에서 만족을 추구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도착에 이르고 만다. 부권적 금지가 없는 반복 충동은 마치 달리는 열차가 속도를 더 높이며 목적지를 잃고 질주하는 것과 같다. 도착적쾌락은 만족의 차원을 넘어 고통스러운 쾌락의 차원에서 무한 재생된다. 결핍이 아니라 초과적 만족과 초과적 범람으로 인해 더욱 허기지고 더욱 공허하게 된다.
# 환상을 버려야 내가 산다.
강박적 구조의 남성은 지배 충동, 사물을 지배하려는 충동을 자유롭게 행사하려는 유아기의 독재측면을 보인다. 그의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미라'로 만들기를 원한다. 모든 요구와 욕망을 포기한 채로 죽은 자와 같이 텅 빈 사람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여성과 접촉하지 않고, 여성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닿지 않는 어떤 차원으로 데려갈 수 있을 때, 강박증자는 그것이 완전한 자신의 소유물이 되었다고 안심한다. 이러한 욕망에 어떤 여성들은 결국 자신을 포기하고, 그런 남성의 욕망에 동일시된 욕망으로 자신을 속이며 살기도 하고, 또 어떤 여성들은 끝끝내 도발하거나 그 구조에서 뛰쳐나오기도 한다. 이 때 많은 남성들의 변은 '나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 있다'라고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 한다. 이 강박적 구조의 형성 이면에는 그들을 독재자로 만드는 부모의 잘못된 양육태도가 있다. 부족하기 전에 채워주고, 말하기 전에 이루어주고, 요구하기 전에 입속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태도이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이 그런 남편으로부터 고통을 겪으면서도 또 다시 아들을 키우며 그런 남편을 반복 생산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파트너를 볼 때 자신이 상상하고 꿈꾸는 상을 그에게 투사한다. 즉 여성이 사랑하는 대상은 그 자체가 아니라 여성 자신이 투영한 어떤 상이다. 반면 남성은 여성을 향해 자신을 채워줄, 잃어버린 엄마의 젖가슴을 소환하는 의미로 여성을 찾는다.
# 애도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정서적 지지나 감정의 회고가 아니라 충동을 파악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충동의 포로가 되어있으며 그 충동으로 인해 어떤 반복을 겪는지 읽어내는 것이다. 상처나 외상으로부터 비롯된 충동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나에게 어떤 쾌락을 발생시키고,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의식할 수 없는 쾌락을 놓지 못하는지를 읽어내야한다.
#나르시시즘의 투사적 동일시
타자와 나를 분리해 객체로 인정하지 못하는 아이들(상상계)는 내가 가해를 한 것인지, 타자가 나에게 가해를 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내가 슬픈 것을 엄마가 슬픈 것으로, 엄마가 슬픈 것을 내가 슬픈 것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부모나 타자가 내 마음처럼,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엄청남 공격성이 출몰하기도 한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욕구를 모두 채워야한 상처없는 아이로 자라게 한다는 환상을 가지기도 한다. 결핍없는 온전한 아이로 성장시키고 싶은, 즉 내면에는 내가 그런 온전한 부모가 되고 싶은 그 환상도 하나의 나르시스즘적 환상이다. 이것은 모자라서가 아니라 과도한 범람이, 초과된 무엇에 압도되어 타자와 나, 세계와 나를 분리하지 못해 일어나는 고통이다.
# 도무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싶다고 호소하는 사람들. 일상의 문제는 없지만 지루하고, 살만하지만 무기력하고, 많이 배우지만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래도 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진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책을 읽허나 분석가, 전문가를 찾는 상태 ->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힘써야 하는 원칙, 불쾌하거나 불편한 에너지 소모를 피하려는 쾌락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은 실천이며, 실천은 행동이며 노동이다. 애도 또는 행위이며, 행위는 노력이다.
많은 이들이 ' 내 적성을 찾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면 된다' 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내 깊숙한 내면에서 찾아낼 수도 없다. 정신 분석을 하게 되면 내가 아닌 나를 걷어내게 되고, 이렇게 걷어내다 보면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대단한 의미를 가진 무엇을 찾아내는 것 또한 판타지이며, 지극히 사소하고 하찮은 무엇이라도, 그것을 내 삶의 중심으로 가져다 놓고 '진짜'가 되도록 만드는 노동이 존재할 뿐이다.
정신분석이 진정한 변화로의 이행이 되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한번, 한두시간의 언어와 사유작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의 변화를 주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그림이나 악기를 배울 수도 있으나, 이것이 내 삶의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취미가 아니라 없으면 안 될 둣한 태도로 그것을 맞이하고 노동해야한다.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취미라도 내 삶의 핵심과 중심으로 승격시키지 못한다면 그저 취미를 전전하는 것에서 끝나고 만다. 지루해지면 그만두고, 또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반복을 해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으로서의 실천은 자아를 잊을 만큼 몰입하고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단지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층위에서의 반복을 해야한다. 생각이 멈추고 노동이 실천이 된느 순간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 이미지와 의미들이 함께 정지된다. 자아가 멈추고 오직 살아있는 사물로서 절정에 다다른다. 삶을 뒤바꾸고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실천으로서의 노동만 있을 뿐이다. 새로운 일이든, 익숙한 일이든, 마치 그것이 내 삶에 없어서는 안될 무엇인 양, 많은 양의 에너지와 노동이 투여되어야 한다.
# 내 삶이 어느 순간 숨이 막히고 갑갑한 터널 속 같다고 느껴진다면, 출구가 보이지 않아 막막하게 느껴진다면 멈추고 덜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시간을 비우고, 식단을 비우고, 옷장을 비우는 멈춤과 결여를 허용하는 실천의 순간이 필요하다.
# 가족이나 가까운 살마들에게 느끼는 분노와 증오감정이 그들과의 관계를 해치고 싶지 않은 방어로 억압될때 우울과 무기력이 나타난다. 대다수의 남성들은 감정을 매우 수동적으로 인식하거나 자신의 감정과 대면하기를 어려워한다. 그들 중에 부모나 아내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넘어 증오의 감정을 갖는 경우가 있다. 가까운 가족에게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직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혐오감으로 부터 수동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방법으로 우울을 택하고 약을 처방받으나 일시적으로 괜찮은 듯 하다가도 어떤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문제의 근원은 우울이 아니라 분노이기 때문이다. 즉 바닥에 깔린 분노와 증오가 말로 표현되지 않고, 자신의 분노와 감정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끝없는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있는 힘껏 감정을 언어에 안착시켜야한다. 이것이 애도작업의 햄심이다.
#불편하거나 불쾌한 접촉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우리는 회피를 통해 방어하려한다. 그러나 이 불편한 과정과 절차를 겪고 고통스러운 작별인사를 해야 남을 삶을 거리낌 없이 살 수 있다. 무언가에 책임과 실천을 다하게 되면 설사 그 절차가 매우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후회나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떄문이다. 우리가 불편한 순간을 대면하지 않고 회피하는 애도는 진정한 애도가 아니다. 도망가고 회피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본능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것을 실천하고 책임지는 선택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충실할 수 있다.
#유아는 대상을 받아들일 때 좋은 대상, 나쁜 대상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눠 세상을 인지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모호한 상태, 중립적 상태, 양가적 상태를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한다. 그러다가 점점 자라면서 좋고 나쁨이 함께 공존하고, 둘로 나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어른들과의 소통과 대화가 중요하며, 친구들, 선생님, 주변의 여러환경과 접하고 소통하면서 조금씩 의식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아버지(어머니)가 없는 상태에서 아빠 (엄마)를 이상적으로 그리워하게 된다. 아빠(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어린아이가 그 부재의 자리에 아빠 (엄마)에 대한 이상화를 기표로 세운다 (부재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하여 환상을 심어 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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