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 _ 박우란 

 

 

타자의 욕망으로 사는 것이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내가 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어떻게 타인을 경유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실현하고 만족시키는 사랑을 할 것인가?

 

[ 나에게 몰두하는 힘 ]

내적 불안이 높고, 불만족에 사로잡히다 보면, 에너지가 자꾸 내 안이 아닌 외부로 향한다.

외부의 조건을 개선하면 삶이 나아지지 않을까 끊임없이 생각하여, 외부의 조건을 제거하거나 개선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외부의 조건에 사로잡히는 나의 에너지는 그저 내가 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과 대면하지 않기 위한 알리바이 중 하나이다. 

 

외적인 환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만약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이라면, 스스로 나약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 안의 어린아이가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 일 수 있다. 마치 엄마가 없다는 생각만으로 절망하고 공포에 휩싸이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인인 지금의 내가 많은 부분 상상으로 만들어낸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계속 떨며 불안해할 필요가 있을까? 가보지 않은 길,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것에 대한 발디딤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고 두렵게 하지만, 막상 발을 디디면 걸어갈 만한 것이 대부분이다. 모호하고 불투명한 상태로 나를 밀어 넣는 일은 무모해 보이지만 내 삶을 온전히 새롭게 만드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통로와 같다. 모호함은 안정의 반대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가능성에도 열려있는 상태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되돌리는 것은 에너지를 내부로 향하게 만드는 노력이다. 

외부의 문제를 그냥 두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왜 과감하게 선택하지 못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봐라.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서있다면 왜 그곳에 서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봐라. 

 

[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와 수용 ]

상담을 통해 고통이나 상처의 원인을 알기 위해 과거를 탐색하는 것은 사실상 애도에 해당한다.

그러나 애도 만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애도를 넘어, 즉 원인을 알아차린 후에는 그 원인을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느냐에 따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의연하게 임하는 사람은 오만한 운명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서 행운과 불운에 굴하지 않고 운명을 직시하며 태연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다 -보에티우스-

 

삶에서 일어나는 반복, 즉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면 삶을 가볍게 만들고 즐길 수 있는 차원으로 끌고 나갈 수 있다. 

불행이라고 여기는 상태나 현상도 수용하기에 따라 더이상 불행이 아닌 주체적인 삶의 열정이 될 수 있다. 

 

자녀문제, 배우자 문제로 고통받을 때, 여성은 인정과 승인, 애정에 매어 같은 갈등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을 혐오스러워하고 끔찍하게 여긴다. 이런 애증으로부터 처연히 떨치고 나와 오직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선택도 훌륭하지만, 나에게 불행을 주고 고통을 주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위대한 용기에 해당한다.

파도가 올 것을 알고 도망가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파도가 오는 것을 보면서 그 위에 올라타는 것. 이것이 수용이다. 

 

 

[절대적 신뢰 그 요원한 소망]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저버리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는,  아이가 부모로부터 안전함과 절대적 자아를 보호받기를 원하는 욕망이다. 상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달라고 조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다는 소망인데 이것은 건강한 친밀함이 아니다. 

즉 상대와 친밀함 과 애정으로 밀착될수록 요구와 욕망에 매몰되어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렵게 된다. 

결코 서로에게 온전히 채운 수 없는 구멍을 안은 채로 함께 가는 것이 진짜 신뢰일 것이다. 

 

내가 파트너를 선택할 때 가장 큰 기준은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저버리지 않는 상대.

내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대. 지금껏 내가 사귀었던 상대들은 이런 조건에 의해서 선택되고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왜 이런 파트너들과 함께 하면서도 나는 외롭고 힘들었을까?

 

1. 이들과 함께 하며 의존과 안정에 대한 욕구는 채워졌지만, 나의 다른 욕구(자유롭게 세상을 탐험하고 싶은 욕구, 변화에 대한 욕구 등)들이 좌절되었다. 

2. 의존과 안정에 대한 욕구가 너무 컸던 나머지, 그 기준이 너무나도 절대적이 되어버려, 파트너를 선택할 때 살펴봐야할 조건들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생활 패턴, 습관, 공통의 취미나 관심거리, 가치관, 미래의 계획 등) 

3. 절대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에, 반대로 절대적으로 의지한 상대가 나의 기대에 못 미쳤을 때 오는 배신감,후회, 분노가 너무도 컸다.  

4. 반대로 더욱더 밀어내고 소외시키곤 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버리고 배신을 하기도 했다. 

5. 더 통제하고 더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서 상대가 나를 떠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무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소유와 통제의 욕망) 이것은 상대방을 의무에서 면제시키고, 내가 그 짐을 다 들고 모든 문제를 맡아 해결하는 패턴을 이끌었고, 결국 나는 지쳐 번아웃되었다. 

(약자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헌신하고 희생시키며 고통을 경험하면서 소유와 통제의 쾌락을 경험)

 

아마도 어릴적 절대적인 신뢰, 절대적인 의존을 경험하지 못하여 이를 계속해서 갈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나에게도 필요한 욕구일까? 한참 성인인 나에게 절대적인 의존의 대상이 필요할까? 

이걸 버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가볍게 살면 어떨까?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 의존이 더이상 파트너를 선택하는 최상위기준이 아니라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상대를 선택하고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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