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트랙: 나 _ 마음과 삶의 행복경영

1_02_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_ 루퍼트 스파이라 _ 책 요약

북성 2023. 12. 2. 03:23

다음은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_ 루퍼트 스파이라 저/  책을 요약한 글입니다. 

 

Being aware of being aware 

 

[서문]

 

내면으로 향하는 길

진정한 평온함과 행복이란, 마음이 외적인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향하도록 해야, 즉 마음의 본성을 탐구해야만 얻을 수 있다. 

어떠한 신이나, 스승, 만트라, 호흡훈련등에 집중하는 기존의 종교적, 영적 수행은 모두 대상적 경험에 불과하다. 

대상적 경험의 내용으로 부터 벗어나 그 대상적 경험의 근간을 이루는 원천이나 본질로 마음이 향하도록 하는 것이 명상이나 기도의 본질이다. 

스스로를 기억하고 (자기기억self-remembering), 스스로를 탐구하고 (자기 탐구self-enquiry), 스스로를 지켜가는 (자기준수self-abidiance)길, 즉 굴복*의 길 (surrender path)이 바로 내면으로 향하는 직접적인 길(direct path)이다. 

마음의 알아차림이 자신의 본질을 향할때, 마음은 점진적으로 또는 갑자기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며, 그럼으로서 지금까지 대상적 경험속에서 찾아 헤매던 평온함과 행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평온함과 행복은 마음 그 자체의 본성, 우리의 본성이다. 

그리하여, 지속적인 평온함과 행복은 늘 우리 안에 잇으며, 누구든지,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모든 위대한 종교와 영적인 전통들이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굴복이란, 패배해서 항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을 열고 모든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집착도, 거부도 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을 저항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 

 

행복이 드러나는 순간은 마치 잿빛 구름 사이로 파란 조각하늘이 살짝 드러나는 것과도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그저 불만족이라는 구름이 잠시 없어진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의 여러 층위를 뚫고 내려가 마음의 본래 모습을 깊이 탐구해 본다면, 우리 마음의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실체, 즉 파란 하늘과도 같은 평온함과 온전한 충족을 발견하게 된다. 

즉 행복이란 불행과 더불어 번갈아 일어나는 일시적인 경험이 아니며, 우리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우리의 본성이며,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우리 자신의 핵심에 존재하고 있다. 행복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드러나는 것이다. 

 

가장 깊고 본질적인 평온함과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에 집중하고, 마음을 관찰하는 명상은, 쉽게 대상적 경험으로만 향하기 마련인 마음의 주위를 내면으로 향하도록 하여 스스로의 본래적이고도 실체적인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길이며 곧 직접적인 길(direct path) 이다. 내면을 찾는 모색에 관련된 철학, 그리고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베단타(Vedanta)철학에서 정교히 설명되고 있다. 

 

깨달음과 대상적 경험의 재통합 

그러나 '내면으로 향하는 길'이란 전체 여정의 절반에 불과하다. 일단 마음의 본성을 깨닫고, 내재된 평온과 무조건적인 기쁨에 접근할 수 있게 된 다음에는, 외부세계에 대한 대상적 경험으로 우리의 주의를 돌려 우리가 새로이 얻은 내면의 이해를 토대로, 그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관계를 맺는 모든 방식을 재구성해야한다. 내면으로 향하는 길의 정점, 즉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알아차림 그 자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과 실체의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 알아차림임을 깨닫고, 그것이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과 우리의 대상적 경험을 통합해 내지 못한다면, 이 순수한 알아차림의 본성과 다른 모든 사물들과의 관련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세상속에서의 체화된 삶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게 되고, 결국 개별적 자아라는 도피처로 계속 되돌아 올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에 관하여는 탄트라(Tantra) 철학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투명한 몸, 빛나는 세상: 감각과 지각의 탄트라 요가 (Transparent body, luminous world; the Tantric Yoga of sensation and perception] 사하자Sahaja 출판사, [의식의 본질: 마음과 물질의 통일성에 대하여(The nature of Consciousness; Essays on the Unity of Mind and Matter) 사하자 Sahaja, 뉴하빈New Harbinger출판사 ) 

 

[1장]  알아차리기

알아차리기와 경험의 관계는 마치 영화관에서의 스크린과 영상의 관계와 비슷하다.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있는 스크린은 자기 자신 위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직접 경험하고 있다. 알아차리기는 우리안에 숨겨져 있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의 뒤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배경과 같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는 영화의 내용에 빠져 스크린 그 자체를 간과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경험의 대상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알아차림 그 자체를 대개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경험의 조건이나 질에 좌우하지 않고, 모든 경험 속에서 똑같이 빛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이며, 경험의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는 알아차림을 경험의 전면으로 나오게 하고,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이 배경으로 물러서게 함으로서 순수한 알아차림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라. 바로 거기에 평온함과 행복이 있다. 

깨달음, 자각, 알아차림은 힘들게 수련하거나 오래 명상함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특수한 경험이나 상태가 아니다. 그저 마음의 본성 그 자체를 인지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알아차리기를 경험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안다는 경험을 아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내가 알아차리는 것을 아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자는 분명히 '나'이며, 나는 즉 알아차림이다. 나는 '알아차린다'라는 경험은 알아차림의 자기자신에 대한 앎이며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아는 데에는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2장] 알아차림의 본질 

- 영화의 내용 때문에 스크린 자체가 요동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알아차림 그 자체가 경험의 내용에 따라 영향을 받는 일도 없다. 

순수한 알아차림은 대상을 통한 경험으로 인한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는 본질적인 평온함,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평온함이다.  알아차리기는 경험에서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험으로 부터 아무것도 얻지 않으며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온전하며 완전하고 충족되어 있다. 즉 알아차림의 본질이란 마음, 몸, 세계의 상태에 좌우되지 않는 모든 조건, 상태, 환경으로 부터의 자유로운 행복이다.

-스크린은 영화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utterly defenceless)이다. 하지만 스크린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스크린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것처럼, 알아차림 또한 모든 경험에 대해 완전히 열려있고 무방비 상태이지만, 결코 해를 입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영화속 인물이 태어날 때 스크린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영화속 인물이 늙거나 죽어도 스크린은 늙거나 죽지 않는 것 처럼, 몸이 생기거나 태어날때 알아차림이 태어나거나, 몸이 늙거나 죽을 때 알아차림도 함께 늙거나 죽는 것이 아니다. 알아차림은 스스로의 등장과 사라짐, 시작과 끝, 탄생과 죽음을 결코 경험하지 않는다. 

결국 알아차림에는 결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3장] 우리 본질의 핵심을 살펴보다 

알아차림이란 주의 집중을 이완시키고 대상적 경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주의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하고 쉬게 하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한정된 알아차림)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정신적인 활동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이 스스로의 원천이자 본성인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되돌아가고, 쉬고, 침잠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자아는 무한한 알아차림이 눌려서 찌그러지고 제한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언제든 원래의 편안하게 이완된 본연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며, 이렇게 되돌아가려는 힘이 바로 행복을 향한 열망, 신을 향한 갈망이다. 

 

[4장] 뒤엉킨 알아차림 풀어헤치기 

유한한 마음은 제한되지 않은 알아차림의 변형된 형태이지만, 무한한 알아차림을 결코 알 수 없다. 

알아차림의 활동이 곧 마음이며, 마음은 알아차림이 움직이는 것, 알아차림은 마음이 쉬는 것이다. 명상은 알아차림을 스스로의 활동(마음)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비활동, 비실천으로서의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활동을 가라앉힐 수 있다. 그러면 알아차림이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마음을 대상이 없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며, 마음이 이처럼 대상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때, 이완되고 가라앉으며(sinking the mind into the heart_라마나 마하리쉬) 자신의 원천인 알아차림으로 되돌아간다. 

 

[5장] 애쓰지 않는 길 

명상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마음을 어딘가로 향하게 할 필요도 없고, 마음을 집중하거나 통제할 필요도 없이 그저 알아차릴 뿐이다. 지금까지 주먹(개별적자아, 에고)을 쥐고 있느라 계속 애를 쓰고 있던 것이지, 손을 펴기 위해서 새롭게 애를 써야하는 것이 아니다. 알아차림 상태에 머무는 것, 애쓰지 않는 존재가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모든 의도적인 노력을 다 놓아버릴 때 순수한 알아차림의 상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따. 

 

[6장] 내면으로 향하는 길 

"나는 신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나 자신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신을 발견했다" _ 수피격언

"스스로를 아는 자는 신을 안다" _ 발리아니 

"나는 신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결국 다 포기하고 되돌아왔을때, 신은 바로 거기에, 내 안에 있었다_Lalla

우리는 언제나 대상_ 물질, 활동, 마음상태, 인간관계속에서 평온과 만족감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간혹 원하는 것을 얻거나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찾아헤매기를 멈추게 되고, 이러한 멈춤 덕분에 잠시나마 평온과 만족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므로, 다시 찾아헤매는 여정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고 돌아설 때', 즉 대상적인 경험에서 평온과 만족을 찾아헤매는 것을 멈출 때, 그리하여 방향이 없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고, 마음의 근원인 알아차림의 중심으로 더 깊이 가라앉을 때, 이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평생 갈망해온 영원한 평온함과 만족감을 맛보게 된다. 

 

[7장] 영광의 구름을 이끌고 나아가다

괴로워 한다는 것은 곧 대상적 경험안에서 끊임없이 행복을 찾으려 애쓴다는 뜻이다. 또한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은 결국 대상적 경험에 불과한 것으로, 알아차림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런 다양한 마음을 조용히 알아차릴 뿐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일도 없고, 싫어하는 일도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개의치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는다. 그래서 늘 평온하고 행복하다. 

우리가 생각, 감정, 감각, 지각에 더 이상 이끌리지 않게 되었을 때, 개별적 자아, 에고에 어디상 이끌리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안착할 수 있다. 

 

[8장] 알아차림의 바다

알아차림을 바다에 비유하자면 생각은 수면에서 움직이는 파도, 느낌은 그 밑에서 흐르는 해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파도와 해류가 바다의 움직임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마음 (생각, 느낌)은 알아차림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닷속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하다. 파도나 해류가 바닷속 깊은 곳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흐르게 되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넓어지다가 언젠가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활동이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파도나 해류는 자신의 형태를 잃게 되며, 그 결과 자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처럼 마음은 자신의 본질로 점차 가라앉으면서 고요해지고 넓어진다. 그리고 명료하고 빛나는, 고요한 알아차림속으로 참잠한다.